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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찰방비석

방거사 2011. 3. 11. 13:16

             찰방(察訪) 비석

 


                                                                           방 종 현


 

  ‘영세불망비’

  영원세세 잊지 말라는 뜻으로 돌에다 새긴 말이다.


  계룡산 여행길에 공주 이인면 청사에서 본 비석이다. 도대체 얼마나 훌륭한 삶이었으면 송덕(頌德)이니, 영세불망(永世不忘) 이니 하며 돌에 새겨서 기억하고자 했겠는가.

  충남 공주군 이인면 사무소 앞에는 일련의 비석군(群)이 있다. 하나 둘이 아닌 여덟기나 되어 군(群)이란 표현을 쓴다.

  이인면은 원래부터 이인면이 아니었다. 고려조에는 ‘이도(梨途)’ 현(懸)으로 불러오다가 조선조에 와서 세종임금이 즉위하자 이름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세종임금의 아명이 ‘이도’(李途)라서 발음상 같은 ‘이도’이니 감히 임금님의 함자를 따라 부른다는 것은 불경스럽다 해서 길도(途)字를 어질 인(仁)字로 고쳐서 이인면으로 했다 한다.

  우리 대구도 고려조에는 대구(大丘)로 표기해오다가 조선조에 유교가 들어오면서 유학의 비조인 공자님의 이름이 구(丘)라서 같은 이름을 피하자는 유림의 과잉친절로 큰 언덕 구(丘)자에 부방 변(阝)을 붙여 땅이름 구(邱)로 바꾸었다니 이인면 지명의 수난사가 대구와 닮아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지금은 오히려 이름 붙이는 걸 명예로 알아 세종대왕, 을지문덕 장군, 이순신 장군 등의 업적을 기려 세종로, 을지로, 충무로 등의 거리 이름도 있고 김대중 컨벤션 센터, 박정희 체육관 등의 건물 이름도 있다. 외국의 경우에도 프랑스의 ‘드골’ 공항이며 미국의 ‘케네디’ 공항 등이 있다. 같은 발음이라는 이유만으로 있던 말도 바꾸어야 했던 옛날에 비하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이인면 청사에 늘어선 비석들에는 하나같이 석이(石耳) 버섯이 돋아 오랜 연륜의 더께가 묻어난다.

  거의가 찰방 OOO 공덕비, 찰방 OOO 선정비, 또는 찰방 OOO 청덕선정비, 찰방 OOO 영세불망비 이런 아류 일색이다.

  찰방이란 어떤 직책이었을까?

  조선시대 중요지역에 역참을 두어 마필(馬匹)을 관리하게 하였는데 외직으로 종6품에 해당되는 우두머리를 말한다.

  조정에서 내려 보내는 칙서 같은 공문서를 수령 방백에게 전달하는 임무와 암행어사가 마패를 보이면 마필과 나졸을 지원해서 어사의 임무수행을 돕기도 했다.

  또한 관리가 공무로 출장을 가면 마필도 빌려주고 머무는 객사도 있고 마구간과 마필을 돌보는 관리들의 역관도 있었을 터이니 꽤 번성했던 곳이기도 하다. 조선조 초기에는 23곳의 찰방이 있었고 한때는 40곳까지 있었다 한다.

 

  죽은 임금의 묘지를 관리하는 사람에게 능참봉벼슬을 주는데 능참봉이란 종9품의 벼슬자리로 별 볼일 없는 한직이란 뜻으로 쓰인다. ‘나이 60에 능참봉’이란 말도 여기서 나왔다고 한다. 알량한 벼슬이지만 죽어서 후손들이 지방을 쓸 때 학생부군을 면하니 참봉 자리하나 얻으려 안달을 했다는데, 찰방은 종6품이나 되니 헛기침 깨나 할 만한 자리이었나 보다.

 

  김대중 정부 시절 모 인사의 인사 사건이 생각나 쓴웃음이 나온다.

대통령이 그 사람을 법무장관으로 등용하자 그 위인 “가문의 영광이요 하해같이 크신 은혜 영세불망  견마지로를 다해 충성하겠노라”고 충성편지를 올린 것이 언론에 공개되는 바람에 여론의 뭇매를 맞고 한 달 장관으로 그만 도중 낙마하고 말았다.

  그데로 가만있던지 고마웠으면 마음속으로 했더라면 일국의 장관을 좀 더 오래했을 터인데 과공은 비례라 했다. 하기야 그런 위인은 국민을 위한 장관이 아니고 통치자를 위한 장관감 이었으니 국가를 위해서도 잘된 일이기도 하다.


  선정비나 불망비는 대개 지방관이 임기를 마친 후 선정에 감읍한 고을 백성들이 자금을 추렴해서 세우는데 과연 백성들이 감읍해하며 불망비를 세웠을까 의문이 든다.

  한 생을 살다간  평가는  후인(後人)의 몫이니 각자는 처신을 삼가야할 일이다.



출처 : 수필과지성
글쓴이 : 방거사(방종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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