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던 고향은
방 종 현
안동, 구미를 지나온 낙동강이 현풍 설화들을 적시고 대니산(大尼山)을 굽이돌아 진 등을 타고 내려온 서쪽기슭에 나의 살던 고향 오설 리 이다.
조선 성종 때 대유학자인 한훤당 김굉필선생과 일두 정여창선생이 연산군 때 무오사화 로 화를 당하여 낙향하였으며, 두 분이 이곳에서 만나 시를 읊고 풍류를 즐기면서 후학에게 강학하였던 곳으로 유명한 제일강정(第一江亭) 이 있다. 일명 이로정(二老亭)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김굉필, 정여창 양 선생(두노인)을 칭하여 붙인 이름이다. 1885년(고종 22)에 영남 유림에서 선현을 추모하기 위하여 개축하였고 1904년 중수하였다. 남서향으로 자리한 이로정의 처마 아래 중앙에 이로정과 제일강정 이라는 현판이 걸려있고 정면 둥근 기둥에는 두 선생께서 지은 '유악양' 이란 시가 현판에 새겨져 있어 운치를 더하고 있어 소개하자면.
風蒲獵獵弄輕柔(풍포렵렵농경유)
바람에 돛단배는 살랑살랑 흘러가고
四月花開麥已秋(사월화개맥이추)
사월에 꽃피더니 문득 보리가을일세
看盡頭流千萬疊(간진두유천만첩)
천만겁 두류수를 아득히 바라보니
孤舟又下大江流(고주우하대강유)
배 한척 외로이 큰 강 따라 흘러간다.
면소재지에서 1km 쯤가면 곰재 라는 동네가 나온다. 이곳은 함안 조씨의 집성촌인데 옛날엔 곰이 자주 나타난다 해서 붙인 이름일 것이라 짐작해본다. 거기서 안촌을 지나 작은 고개를 하나 넘는데 물넘이 고개이다. 그 고개로 물이 넘어오리라고 상상 도 못했는데 10여 년 전 그 곳으로 달창수리조합에서 수로를 연결해서 물이 넘어가고 있으니 언젠가 물이 넘어갈 걸 예상해서 이름을 붙였는지 옛 사람들의 예지에 탄복 할 따름이다. 물 넘 이 고개 넘어 1.5km쯤 더 가면 나의 살던 고향인 오설리(烏舌里)이다.
대니산을 뒤로하고 낙동강을 앞에 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이다
오설리는 까마귀 오烏 자에 혀설舌로 쓰는데 늡덩을 뒤로하고 서당골을 돌아들면 안산(案山)이 보이는데 그 안산이 마치 까마귀혓바닥처럼 생겼다 해서 붙인 이름이라한다. 동네이름 때문에 한문시험에 득을 보았던 적도 있었다. 새조鳥자와 까마귀 오烏자 를 구분하는 문제였는데 새조(鳥)자와 까미귀 오(烏)자는 획수 하나 차이가 난다. 오설리에는 우리성씨가 70여호가 울도 담도없이 살아간다. 아무 집에 가도 밥을 먹을 수 있는 아재요 형제 벌 친척들이다. 초등학교 때만해도 우리성씨가 세상에 제일 많은 줄 알았던 우물 안 개구리시절이 있었다.
오래 만에 찾은 옛집 마당에 대추나무가 열매를 실하게 달고 반긴다. 나무 등걸을 쓰다듬어본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 자리에 있었던 나무다.
고향집 담 밑에 봉숭아가 반긴다. 봉숭화에 재미난 사연이 있다.
내가 맏이여서 내 위로는 아무도 없고 나보다 두 살 위인 고모가 있었다.
여름 방학 무렵이면 봉숭아 꽃잎을 따다가 손톱에 물들이며 내 손가락에도 실로 찬찬 감아주던 고모가 생각이 난다 .
여름에 손톱에 물들인 봉숭화 꽃물이 첫눈 올 때 까지 지위 지지 않으면 첫사랑을 만난다고 마음 졸였던 기억이 난다.
첫사랑이 무언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
봉숭화 를 손톱에 물들이는 꽃이라 하여 지갑화(指甲花)라 부르기도 한다.
봉숭화를 심어두면 뱀이나 개구리 같은 해충이 집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고 시골마을 울밑에 내남없이 심어두기도 한다.
봉숭화 에는 뱀이 싫어하는 향기가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봉숭화를 禁蛇花(금사화)로 부르기도 한다.
또한 봉숭화 꽃이 봉황을 닮은 신선 같다 해서 鳳仙花(봉선화)라 부르기도 한다니 봉숭화가 꽤 격조가 있는 꽃인가 보다.
방학이 되면 책가방은 던져두고 그땐 가방은 없고 책보자기였지만, 천둥벌거숭이로 놀다가 방학이 끝나갈 무렵이면 밀린 숙제를 해야 하는데 이때 일기쓰기가 제일 고민이었다.
일기내용이라 해봤자 수영하기 소꼴배기 친구들과 놀기 심부름 하기 등 신변에 일어난 시시콜콜 한 것이 주제였으니 그냥 만들어 넣으면 되지만 일기에는 꼭 들어가야 하는 줄만 알았던 날씨가 문제였다.
몇월 몇일 오늘의 날씨 맑음, 또는 흐림, 또는 비, 이게 문제다. 한 달간을 비가 왔는지 맑았는지 다 기억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거짓말로 써 넣을 수가 없어 고민이었으나 그것도 다 해결방법은 있었다.
모범생인 명숙이가 옆집에 살고 있으니까 명숙이 한 테 사탕 사 주며 날씨 베끼기를 해서 해결하기도 했다.
딴은 명숙이가 시집가서 아들을 판사로 만들었으니 모범생임이 입증된 셈이기도 하다.
귀로에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 교정을 들렀다. 미루나무 꼭대기에서 그악스레 울어대던 내 유년의 매미가 지금도 울고 있었다.
높게 날던 잠자리도 나래를 접고 울타리에 앉아 숨고르기를 하고 있다 . 매미도 잠자리도 떠날 때를 아나보다. 아침나절 엔 소매 끝에 기어드는 바람이 싱그럽다.
개학이 다 되어 갈 땐 허전해진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가는 여름을 원망스레 했던 기억이 지금도 내 마음 한켠에 소롯 이 일어남은 어쩐 일일까?
아직도 나는 철이 덜 든 어른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