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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연기

방거사 2011. 9. 6. 20:50

저 녁 연 기

 

방 종 현

 

 

저녁밥 짓는 연기는 피붙이를 부르는 신호이다.

골목에서 놀고 있거나 들에 있다가도 저녁연기가 피어오를 때는 부르지 않아도 어김없이 집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눈썹달이 비켜서는 저녁 답 소쩍새는 울어 예우고 골목길은 된장찌개에 점령당해 있다.

두레상에 둘러앉은 식구들은 서로 오늘의 있었던 얘기들로 입이 분주하다.

나의 눈물 나게 그리운 고향의 모습이다.

소쩍새는 보리누름에 많이 운다.

작은 솥으로 밥을 해서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은 며느리의 원혼이 된 소쩍새가 이 산 저 산 옮겨 다니며 ‘솥 적다, 솥 적다’ 운다고 하여, 소쩍새라 부른다는 전설이 있다.

배고픈 긴긴해를 보내기가 얼마나 어려웠으면 ‘동무 동무 씨동무 보리가 나도록 살자’며 보리 고개를 넘자고 노래했을까.

식량은 떨어지고 햇보리가 날 때까지 서민들이 굶주리는 시기를 보릿고개라 불렀다.

보리 고개에는 모두가 어려웠다.

어떤 설움을 배고픈 설움에 비하랴.

 

내 초등학교 시절 짝궁에 순이가 있었다 .

순이 아버지는 6.25 때 돌아가시고 위로 오빠 둘과 엄마 네 식구가 어렵게 살았다.

순이는 표정이 밝았고 화장실 청소도 도맡아 하는 남을 배려하는 아이였다.

 

“얘, 어멈아! 현풍 댁 굴뚝에 며칠째 연기가 나지 않는구나. 한 번 가보아라” 하시던 할아버지가 생각난다.

현풍 댁 이란 순이 엄마 택호이다.

굴뚝 연기를 왜 보라 하시는지 그 때는 깨닫지 못했다.

 

그 다음날은 어김없이 내 손엔 작은 자루 하나가 들려 있었다.

순이네 집에 양식을 갖다 주는 심부름은 내 차지였고, 그걸 들고 갔을 때 순이와 눈이 마주치자 뒷곁으로 숨는 순이의 민망한 미소가 내 마음을 짠하게 했던 기억이 있다.

몇 해 후 겨울이 오기 전에 순이 네 는 부산으로 이사를 갔다.

없는 사람이 살기에는 밭 뙤기도 하나 없는 시골에 살기보다 대처에서 부대끼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순이 는 어디서 살고 있을까?

이젠 환갑진갑 넘은 할멈이 되어 있을 순이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걸 보니 아마 내가 그 애를 좋아했던가 보다.

십리근처에 굶어죽은 사람이 없도록 노브리스 오브리제 를 실천한 경주 최 부자 의 배려에는 미치지 못할지라도 이웃의 굴뚝을 보고 없는 살림에도 조금씩 이웃과 나누었던 내 할아버지!

이제 내가 그 때의 할아버지의 나이가 되어 할아버지의 깊은 뜻을 헤아리며 살아보려 노력하지만 그만큼 못하는 것 같아서 새삼 할아버지의 큰 그늘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