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접고사는 남자들

방거사 2011. 12. 31. 11:36

접고사는 남자들

 

                                                                                                                            방종현

 

  우리 때는 할아버지께서 사랑방에 앉아계시기만 해도 집안 일이 큰 마찰 없이 잘 돌아갔다. 앉은 자리에서 헛기침만 해도 대소사간의 통제가 되던 가부장의 권위가 오늘에 와서는 왜 이렇게 사라져 가고 있을까?

오호 통제라! 다시 또 생각해봐도 슬픈 일이다.

  물론 이런 말에 발끈해 할 페미니스트도 있겠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 남자들도 할 말은 있다. 우리 시대에는 여자가 결혼만 하면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게 했다. 돈 벌어오는 일은 남자들이 맡고 여자들은 당연히 가정에서 살림만 살게 했다. 살림살이 가 편한 것만은 아니겠지만 그 당시 사회의 통념이 그랬었다. 돈 버는 일이 얼마나 어려우면 '돈 버는 일은 죽을 모퉁이'라 하지 않았겠는가. 시장바닥에 엎드려 찬바람, 눈비 다 맞아가며 갖은 모욕을 듣고서도 가족들 먹여 살기 위해 돈을 벌었다. 오죽했으면 장사꾼 똥은 개도 먹지 않는다 했을까. 직장생활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상사의 눈치도 봐야하고, 젊은 후배들이 치고 올라오며 자리를 위협할 땐 앞이 막막한 불안감도 느꼈을 것이다. 자기는 고생을 해도 여자는 편안히 집에서 살림만 살게 했었다. 여자를 배려해 주는 게 어디 그것뿐이랴! 미국과 같은 선진국도 여자가 시집을 가면 자기 성(姓)을 버리고 남자의 성을 따르게 하는데, 우리나라는 끝까지 자기 성을 갖게 하고 자기가 나서 자란 동네이름으로 택호까지 불러주지 않았던가?

 

  갖은 고생 끝에 자식들 공부시켜 시집 장가보내고 정년퇴직하여 이제는 편히 쉬며 그동안의 노고를 보상받는 차원에서라도 대우 받아야 할 실버들에게 '간 큰 남자'라는 생뚱맞은 신조어를 만들어 희화화(戱畵化) 하고 있다.

인생의 낙 중에 먹는 것도 큰 낙인데 한 끼도 집에서 안 먹으면 영식님(零食任)이라 경어(敬語)를 붙여주고, 한 끼만 먹으면 일식씨(一食氏)라 해서 예우를 해주고, 두 끼를 먹으면 두 식군(二食君)이라며 평교어(平交語)로 가볍게 부르고, 세끼 다 먹으면 삼시 새끼(삼시 세끼)라고 비하를 한다고 한다. 먹는 것 가지고 치사한 말들을 왜 만드는지 울화가 치민다. 그 뿐인가? 부인이 드라마 보는데 스포츠 중계를 보자고 하면 간 큰 남자라 하는데 빳빳한 종이 돈도 반쯤 접어야 지갑에 넣을 수 있으니 고것쯤은 지폐 접듯 접어 줄 수도 있다. 밥상 받아서 반찬 투정하는 간 큰 남자라는 데에도 이재(利財)에 어두워서 재산을 못 늘렸으니 고것도 손수건 접듯 접어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아침에 밥 달라고 밥상머리에 앉는 간 큰 남자'라는 말에는 절대 양보할 수도 없고 접어 줄 수도 없다. 사람은 먹어야 살지 않은가? 자꾸 접고 접다 보면 더는 접을 것도 없지 않는가. 아무리 웃자고 하는 말이라 해도 자꾸 그런 말을 쓰다 보면 소위 학습효과가 생겨서 서서히 머릿속에 각인되고 세뇌가 되어간다. 그렇게 되면 그 말이 기정사실화되고 그렇게 규정지어지게 된다. 사용자 원칙에서라도 이건 여자들이 만든 말이 틀림없을 거로 생각한다. 세상의 여자들이여! 한평생을 제 몸 만신창이가 되도록 가족 부양을 위해 몸 바쳐 온 실버들을 예우합시다. 믿으시는 분은 잘 아시겠지만, 성경에 이르기를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구주시니라(에베소서 5:22~23) ” 라 하였습니다. 

 

  사랑채에 앉아만 있어도 가정사가 소리없이 잘 돌아가던 할아버지때가 그립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자리를 지키고 있는 존재감으로만 그렇게 되길 바라는 건 만용일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