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양반 상놈
양반 상놈
방 종 현
"아빠, 성 바꾸어줘요"
막내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 때 내게 한 말이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친구들이 '방구'라고 놀리며 '방가는 상놈이라고' 놀린다면서 울먹인다. 듣고 보니 맹랑하다.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할까 고민하다가 아들을 불러 앉혀놓고 양반이니 상놈이니 하는 말은 지금은 구분하지도 않으면서 그런 제도가 없다고 얘기를 해주어도 시큰둥하다. 할 수 없이 족보를 펴놓고 우리 방씨는 신라 신문왕 9년 중국 당나라의 한림학사라는 직책으로 외교사절로 와 선진화된 당나라의 문물을 전파하고 설총과 함께 교화사업을 하다가 신라 조정의 권고로 귀화를 하신 휘諱를 지(智)로 쓰시는 분이라 얘기를 해주자 조금은 이해를 하는 듯하다. 호를 ‘무기당’ 이라 쓰시는 할아버지께서는 조선 중종 때 병조판서와 경상관찰사를 지낸 분이라고 백과사전의 인명 편을 펴서 보여주자 안색이 밝아진다. 내친 김에 자신감을 가지라고 성웅 이순신 장군 위인전을 주며 읽어보라고 했다. 며칠 후 책 읽는 모습을 슬며시 지켜보니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책에 몰입되어 있는 눈치다. 아마 12척 배로 왜군의 배 300여 척을 수장시키는 대목을 읽는 듯했다. 일주일 후 책을 다 읽은 듯해서 아들을 불러 물었다. 이순신 장군 전기를 읽고 느낀 점이 어떠냐 했더니 커서 이순신 장군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겠노라고 한다. 이순신 장군이 참으로 존경스럽다 한다. 아들 대답을 듣고 한마디 해 주었다. 성웅 이순신 장군도 우리 방씨 가문으로 장가를 오셨다. 방 가가 상놈이라면 그런 분이 상놈 집안에 장가를 오겠느냐고 하자 아들이 희색이 만면하다.
아들은 중학생이 되어서도 어느 날 또 성씨를 가지고 놀리는 친구들이 있어 기분 상해하는 눈치였다. 참으로 딱한 일이다. 자기 성씨를 싫다고 버릴 수도 없지 않은가, 성이란 아버지가 아들에게, 또 그 아들이 그의 아들에게 물려주는 연결고리이며 끊을 수 없는 사슬인데 그게 어디 싫다고 버릴 수 있는 문젠가.
아들을 불러 앉혀놓고 해결책이 딱 두 가지가 있는데, 네가 선택하라 하자 무얼까 하며 의아하게 쳐다본다. 첫째는 복싱 도장에 가서 주먹 단련을 해서 힘을 길러 상놈이라 놀리는 친구를 두들겨 패주면 되겠는데 해볼 테냐, 그러면 도장에 등록시켜 주마 하자 아들놈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 다음이 뭔지 내 눈치를 살핀다. 두 번째는 네가 열심히 공부해서 성적을 올려라, 실력이 힘이다, 네가 반에서 일 이등을 하면 아이들이 절대 너를 놀리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너와 친해지려고 할 것이다, 아빠가 책임진다고 하자 아들이 수긍이 가는지 어쩌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자 전교 수석 차석을 다투니 아이들이 실력을 인정해 주어서인지 이제는 머리가 굵어 그런 면에 초연해서인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성 바꾸어 달라고 울먹이던 그 아이가 지금은 자신의 성명이 적혀있는 이름표를 당당히 목에 걸고 대학병원에서 전공의로 수련 중이다.
요즘엔 성씨도 파괴되고 있다. 성이 두 자로 알려진 황보씨, 제갈씨, 사공씨, 선우씨는 진작 알고 있지만 생소한 남윤씨, 김유씨, 정안씨 등등이 보이는데 주로 페미니스트들이 아버지 성에다 어머니 성씨를 붙여서 쓰고 있는 모양이다. 내 후손들도 혹시나 구씨 어머니를 만나 '방구' 아무개로 쓰고 석씨 어머니를 만나 '방석' 아무개로 쓰지는 않을까 걱정이 된다만 스스로 놀림거리를 만드는 사람은 내 후손 중에는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자위해본다.
인간은 타고 날 때부터 천부인권을 갖는다. 자기 능력을 펼 수 있는 토양에서 누구나 신바람 나게 일할 수 있어야 한다. 조상만 들먹거리는 못난 양반이 되지 말고 사회에 기여하는 진정한 참 양반이 되었으면 좋겠다.
요즘도 부원군 후손이니 판서집안이니 대제학을 지낸 집안이니 하며 조상 뼈를 팔아먹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훌륭한 조상의 명예를 이어가야할 텐데 조상 자랑만 잔뜩 늘어놓고는 제 행실은 개차반으로 조상 욕을 먹이는 사람들도 가끔 있어 습쓸하다.
서양의 젠틀맨 정신이야말로 진정한 양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의롭게 행동하고 사회를 위해 솔선해서 베풀 줄 아는 그래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는 그런 사람이야말로 진정 양반이라 불릴 자격이 있다.
조상으로부터 물러 받은 자기 성씨는 끊으려고 해도 끊을 수 없다. 후손들은 자신의 가문이 존경 받을수 있도록 하는일은 각자 자기 몫이다.